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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다/취생몽사

기억을 지운 여자

자그니 2010. 9. 6. 00:32
지난 토요일밤 그녀를 보았다. 잠시 담배를 피며 길에 서서 트위터를 보고 있는데, 그녀가 친구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웃으며 이야기하다, 내 앞을 지나, 빗물의 온기가 남아있는 골목으로 사라져간다. 잠시 바라보다, 다시 휴대폰으로 눈길을 돌린다. 생각해보니, 나는 이미 그녀에 대한 기억을 지웠었다.

몇 달 전이었던가, 오랫만에 만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지나가는 말로 그녀가, 이제 난 기억도 나지 않아요-라고 말을 했다. 아, 그래?, 하고 대꾸하고, 다시 이야기를 나누다, 웃으며, 헤어졌다. 

지하철 역으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는데, 그녀가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지우고 싶었거나, 아니면, 지울만 했거나, 둘 중 하나였겠지. 조금 쓸쓸해져서 어떻게 할까 하다가, 나도 그냥 기억을 지워주기로 했다.

기억을 지우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오른손 검지를 왼쪽 이마에 대고 검색을 시작할 날자를 지정한다. 200x년 x월 x일. 그 상태로 손가락을 오른쪽으로 줄을 긋듯 옮긴다. 그리고 검색을 마칠 날자를 정한다. 검색어는 그녀의 이름, 기억, 밤. 그 다음에 두번 톡톡, 건드려주면 검색결과가 나온다. 검색 결과를 확인하고, 검지로 두번 동그라미를 그려주면 삭제. 삭제하기 전에 '정말 지우시겠습니까?', '복구가 되지 않습니다'라는 경고창이 떴지만, 별 생각없이 클릭, 클릭. 

그렇게 나는 그녀를 지웠었다. 그리고 그녀는, 방금 저 골목으로 사라져갔다. 뭔가 조금, 아릿하게 가슴이 아팠지만 상관없다. 이유 모를 아릿함이라도 남아있다는 사실에 차라리 감사해야만 할까. 인생은 때론,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 날도 있는 거니까. 그냥 그냥, 살아가야만 하는 날도 있는 거니까.

...비록, 해피엔딩은 아닐 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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