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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슬픔 - 신경숙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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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슬픔 - 신경숙

자그니 2003. 10. 18. 11:07
< 이수에게 >

나는 어디를 응시해야 할지를 모르겠구나.
마음은 이렇게 사무친데

어디를 바라봐야 할지를 모르겠어.
이렇게 앉아보고 저렇게 앉아보다

바닥에 엎드려본다.
이렇게 엎드려본 지가 오래된 것 같은데,
줄곧 오래 전부터 이렇게
엎드려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렇게 엎드려서 줄곧
무엇을 기다렸던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구나.

어렸을 땐 내가 이렇게 엎드려 있으면
네가 곁에 와 같이 엎드렸지.
그때 우리 엎드려서 무얼 기다렸니?

네가 내 곁에 엎드려 있다면 네게 묻고 싶어.
나는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여자가 남자에게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묻는 이런 질문은 소용없단다.
시간이 지나면 형편없이 낯설어져 있거든.
나를 바라봤던 사람은 다른 곳을 보고,
나 또한 내가 바라봤던 사람을 버리고 다른 곳을 보고,
나를 보지 않던 사람은 나를 보지.
서로 등만 보지.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이것이야.
그렇게 변할 수밖에 없는 관계 속의 사람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가, 묻는다는 건 부질없는 일이지.

너는 내 동생.
너는 알겠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너는 변하지 않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그대로 간직하겠지.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면
나는 곁에 없을 거란다.
그래도 대답해 주렴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나는 여기에 없어도 들을 수 있을 거야.
네가 바라보고 애착하는 것을 향해 대답하렴.

네가 바라보는 것이 네가 애착하는 것이 나일 거야.
영혼이란 그런 것 아니겠니.

마음속의 사람,
그 사람이 보는 것 속에 머물지 않겠니.

나,
인생에 대해 너무 욕심을 냈구나.
한 가지 것에 마음 붙이고
그 속으로 깊게 들어가 살고 싶었지.
그것에 의해 보호를 받고 싶었지.
내마음이 가는 저이와 내가
한 사람이라고 느끼며 살고 싶었어.
늘 그러지 못해서 무서웠다.

그 무서움을 디디며 그래도 날들을 보낼 수 있었던 건
그럴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어서였지.

하지만 이제 알겠어.
그건 내가 인생에 너무 욕심을 낸 거였어.

이 깨달음은 내게 아무런 힘을 주질 않는구나.
내가 그를 볼 때, 그는 다른 그를 보고,
그는 또다른 그를 보는, 그런 비껴감의 슬픔을 반복하며
저 봄에 발을 디딜 힘이 내겐 없구나.

그것들이 내게 남긴 공허와 망상과 환청과 의심으로는 버틸 힘이 없어.
일이 잘못되었어.
이렇게 되면 안 되는 것이었단다.
이렇게 잘 못 되기전에 다 정리하려고 했지.
지난 일들을 생각지 않으려고 했단다.
지나간 시간 속에서 다른 사람과 정다웠던 기억들,
다 창고 속에 넣으려 했단다.

그런데도 이수야.
어떻게 된 셈인지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만한 건 기억밖에 없는 것 같았어.
그것만이 유일한 것 같았다.

그래, 일이 잘못되었다.
나는 끊임없이 누군가 나를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단다.
그 생각만이 인생을 생각하게 했어.
그 생각만이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줄 것 같았어.
그 사람이 저이인가하면 그이는 이미 내 편이 아니더구나.

왜 안 그러겠니.
세상에는 나 같은 여자들이 수도 없고,
한때나마 나를 사랑한 건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이지,
내가 사랑스러워서가 아니야.
서로 사랑했을 때 조차도 그는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다른이를 사랑했을 텐데
왜 안 그러겠니.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
내가 살아갈 힘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았다고
너만은 생각하지 말아다오.
힘을 잃지 않으려고 내가 믿는 기억들을 찾아 헤맸다.
그것도 힘이 되질 못해 어머니 얼굴을 떠올렸어.
어느 날은 책상 앞에 힘을 내야지, 힘을 내야지,
내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야지, 하고 써붙이기도했지.
단 한번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어머니 생각에,
숨만이라도 그분이 가신 다음에,
라고 내 자신에게 속삭이고 속삭였구나.
하지만 너무 늦었어.

나,
삶을 되찾기엔 너무 멀리 나와버렸어.
무엇이라도 간절하게 원하면
거기에 닿을 수 있다고 믿었지.
하지만 어찌 된 셈인지 그 원하는 것에 닿아지지가 않았어.

너는 너 이외의 다른 것에
닿으려고 하지 말아라.
오로지 너에게로 가는 일에 길을 내렴.
큰 길로 못 가면 작은 길로,
그것도 안되면 그 밑으로라도 가서 너를 믿고 살거라.

누군가를 사랑한다 해도
그가 떠나기를 원하면 손을 놓아주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그것을 받아들여.
돌아오지 않으면 그건 처음부터
너의 것이 아니었다고 잊어버리며 살거라.

이수야.
너에게 미안해.
이렇게 일찍 헤어질 줄 몰랐어.
이제는 나를 지킬 사람은 나 자신뿐이고,
힘을 얻어서 살아가야 한다고
내게 속삭이고 속삭였단다.
하지만 너무 늦었구나.

이 글을 네가 읽게 될 때면 나는 없을 거야.
너 혼자 견뎌야 할 거야.
미안하구나.
하지만 나 죽어서도 너를 볼게.
보면서 너를 지켜줄게.

나,
인생을 망치겠다는 게 아니라
여기에 그만 있겠다는 것이니
나를 잊지는 말아다오.
어렸을 때 너는 기분이 나쁘거나 화가 나면
온종일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지.
너는 그때 '서'자를 발음을 잘못해서
나를 '시'야, 그랬단다.
은시야, 라고.

나를 기억해다오.
네 앞에 있는 모든게 나일 거야.
네가 보는 산과 바다,
아스팔트나 전봇대 같은 것도 나일 거야.
난 네가 내가 살려고 애쓴 것들을 모를까봐 걱정이 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네가 알고 있다면,
가끔씩 잊지 말고 내이름을 불러줘.
나, 어디서나 대답할게.

나, 이렇게 나를 놓아버리지만 않았다면
언젠가 너에게 읽어줄 글을
새로 시작할 수 있을 텐데, 그럴 텐데.
아마도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되었겠지.

나, 그들을 만나 불행했다.
그리고 그 불행으로 그 시절을 견뎠다.



아마 94년이었던것 같다. 이 소설을 읽었을 때가.

나를 기억해 다오,
네 앞에 있는 모든 게 나일거야...

그 애절함에 가슴이 아파서 뜻도 모르고 외우고 다녔었다. 그리고 10년이 조금 모자란 시간이 지금 나는, 이 글을 다시 발견하고 쓰러지듯 마음이 무너져, 운다.

당신,
살려고,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당신,

발버둥치듯 살아가는 당신.

어디서 무엇을 해도 괜찮으니
살아줘요.
살아만 있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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