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취한 81학번이 장난스레 05학번들에게 물었습니다.“너희는 아직 운동권이냐?”그때 저는 그래도 예의상 “글쎄요” 정도의 얼버무림 정도가 대답으로 나올 줄 알았습니다만, 05학번의 대답은 그야말로 청룡언월도같은 ‘아니오’였습니다.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 전과 다 합치면 얼추 세어도별 열 개는 넘길 듯했는데, 그 선배들의 머나먼 후배들은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운동 따위 고민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있었던 게지요. 새삼스런 일도 아니고, 거기에 눈을 부릅뜰 일이나 부라릴 일은 초저녁에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는 걸 모르진 않지만 웬지 씁쓸해져서 81학번에게 “애들이 많이 변했지요?.”라고 물었을 때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81학번 형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아냐. 난 우리 때 우리를 보는 것 같아.합창부하고는 좀 다르고, 그렇다고 운동권도 아닌 것이...... 좀 뭔가 다른 거.... 그게 우리였거든.어쨌든 난 애들이 운동 같은 거 생각 안하는 게 좋네.우리가 이렇게 만들려고, 후배들은 이런 걱정 안하게 하려고전두환이랑 대가리 터지면서 싸운 거 아니냐.”
산하님의 글 90년,94년, 06년의 5만원 에 담긴 이야기입니다. 읽다가 생각난 글이 있어서 옮겨봅니다. 하종강(자유혼)님께서 99년 3월 17일, 나우누리진보통신모임 찬우물에 올리신 글입니다.
할아버지는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의학박사가 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아버님도 의사가 되고 싶어 하셨지만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르면서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당연히 의사가 되어야 하는 줄 알고 자랐고, 그것이 할아버지를 이북에 두고 내려오면서 완전히 몰락한 우리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귀가 닳도록 들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반 편성을 하면서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이과반에 진학한 이유입니다. 학년초에 선생님들은 출석을 부르다가 내 이름이 나오면 "내가 지금 교실 잘못 들어왔나? 여기 문과반인가?"라고 묻곤 했습니다. 그러면 반 아이들은 의례 웃으며 답했습니다.
"하종강 때문에 그러시지요? 종강이가 원래 이과반이에요."
선생님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습니다. 남달리 문학적 소양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무던히도 티를 내고 다녔던 탓입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치룬 배치고사에서 내가 어릴 때부터 당연히 가야한다고 생각했던 의과대학에 성적이 조금 모자랐습니다. 남은 기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꼭 합격하겠다고 했으나, 담임 선생님은 "배치고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등수가 하나라도 모자라면 틀림없이 떨어진다."면서 완강히 마다했습니다.
다른 학과에는 뜻이 없었고, 사립대 의대는 우리 집의 경제 사정 때문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고민하다가... 우리 가문에서 출세의 상징처럼 받들어지던 미국의 삼촌과 긴 통화를 했습니다. 집에서 걸어다녀도 될 만큼 가까운 거리의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진학하기로 했고... 그날 밤, 눈물을 한 '바게쯔'쯤 쏟았습니다. 그러나, 돈을 받으면서 공부를 한다니 그것만으로도 나는 벌써 효도를 하는 듯해서 한 동안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명문대학에 한 명이라도 더 합격시키려는 담임 선생님한테 욕을 바가지로 먹으면서 입학원서를 써 놓고는 수업시간에 '미당의 한국시선'을 보다가 걸려서 교무실로 불려 갔습니다.
"하종강, 너, 여유 있다고 지금 딴 짓하는 거야?"
입시 전날 밤에도 나는 TV의 명화극장까지 모두 보다가 애국가가 나올 때가 되어서야 잠이 들었습니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호기롭게 가졌던 각오는 간단했습니다.
'이 나라의 대학은 2년만 다니자.'
삼촌은, 그 2년은 아예 내 인생에서 없는 셈치라고 했습니다. 자연계는 2년, 인문계는 4년을 수료해야만 정부가 외국 유학을 허가하는 답답한 시대였습니다. 조국의 대학을 2년씩이나 다녀야 한다는 걸 무슨 대단한 수치처럼 여기는 덜 떨어진 수재들이 있었고, 나는 결코 수재가 아니었으면서도 되지 못한 수재 흉내를 내었습니다. 10대를 벗어나지 못한 오만함으로 미래를 바라보니, 20대에 박사가 되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았고, 당연히 강의시간에는 언제나 맨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내가 당연히 과대표일 꺼라고 오해를 하고 교수들은 자꾸 나한테 뭘 시키더군요.
중·고등학교 6년 동안 까까중 머리와 검은 색 교복 속에 갇혀 숨을 죽여야 했던 문화정서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할 수 없었습니다. '천박스럽지만 않다면 가릴 게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날을 잡아서, 9시간 동안 꼼짝 않고 앉아서 맹물만 마시며 관현악을 들어보았는데 견딜 만했습니다. 몇몇 친구들과 함께 고전음악감상회를 만들어 바로크에 푹 젖어 살았습니다. 고등학교 때 미술 선생님과 친하게 지내느라고 미술실에 드나들며 곁눈으로 배웠던 데생을 마저 배우고, 수채화와 유화를 몇 점 흉내내어 전시회장에 걸어 놓으니, 나처럼 세상을 풍요롭게 사는 놈도 없는 듯 싶었습니다.
내가 다닌 대학에는, 그냥 부모가 보내 주신 대학이라고 들어와서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놀고 먹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기특한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실력을 쌓고, 활발한 동아리 활동을 통해서 인간 관계의 폭도 넓히면서 이 다음에 사회에 나가 자신이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을 얻으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소수의 학생들은 대학에 다니는 동안 대학을 위해서 무언가 하려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유익한 것들을 얻으려고만 애 썼던 사람들은 이 다음에 사회에 나가서도 사회로부터 자기와 가족에게 유익한 것들을 얻으려고만 애 쓸 뿐이지 사회를 위해서 무언가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대학에 다니는 동안 대학을 위해서 무언가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그래야 이 다음에 사회에 나가서도 사회를 위해 뭔가 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부터 함께 서클 활동을 했던 존경하는 선배들이 간첩보다 더 흉악한 빨갱이었다는 기사를 조간신문에서 읽었고, 주변의 가까운 선배들이 잡혀갔다는 소문도 간간이 들렸습니다. 선배들의 집에 찾아가 부모님과 동생들을 만났고 재판에도 따라가 '구경'을 했습니다. 교도소 면회실 창문 밖에 서서 가족들 어깨 위로 깡충깡충 뛰어 오르며 말 없는 인사를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시국사범에게는 직계 가족만 면회가 허용되던 답답한 시대였습니다.
'아,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선배들은 저 따위 모진 고문을 받고 십수년 징역형을 살아야 할 만큼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진실은 알려져야만 한다. 뭐가 뭔지도 모른 채, 그저 부모님이 보내주신 대학이라고 건들거리고 다니는 친구들에게,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한마디라도 해야 한다.'
단순했습니다. 저급한 수준의 사회의식조차 없었기에 복잡할 것도 없었습니다. 고전적 휴머니즘이었다고 해도 감지덕지입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달달 외우다시피했던 유신헌법이 사실은 민족적 죄악이었다는 자각이나, 흔히 표현하듯 '역사의식'을 갖기 위한 노력은 그 한참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 무렵, 고전음악과 미술이라는 내 '귀족 취미'는 톨스토이의 예술론 몇 페이지만으로도 이미 혁파되었습니다. "저기 왕자가 나아오네~"라는 짧은 귀절을 완성태에 이를 때까지 수십번이나 반복 연습하는 오페라 가수를 보면서, 톨스토이가 '인민의 눈물 젖은 빵과 저 노래는 어떤 관계가 있나'를 고민했었다는 내용은 유신의 서슬이 시퍼렇던 70년대 초반의 혈기 왕성한 대학생에게 쉽게 공감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기억에 자신이 없지만, 24년 전에 읽은 그 톨스토이의 '예술론' 어느 챕터의 첫머리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다소 경망스러운 짓거리였다는 느낌이 전혀 없지는 않으나, 얼마 후에는 '루카치'를 원서로 읽었습니다.
무풍 지대인줄 알았던 우리 대학에도 좋은 선배들과 친구들은 있게 마련이어서, 자연스레 모였습니다. '아, 대학은 자유와 진리의 광장이며...' 따위로 시작되는 영탄조의 유인물 몇 장을 교내에 뿌린 것만으로도, 굴비 두름처럼 꿰어져 줄줄이 교도소로 가야하는 것이 당연한 듯 감수되던 '비합'의 시대였습니다. 교내 집회나 시위가 10분을 넘기면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결정적인 결단이 요구되었을 때, 나는 작고 어두운 내 방에 들어가 하루 종일 뒤척이며 나오지 않았습니다. '20대 박사'로 상징되던 온 가족의 꿈이 아까워 고민했습니다. 어머니가 이따금 내 방문을 열어 보시고는 아무 말 없이 닫으셨습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난 후 아침 밥상머리에서, 사춘기의 한 가운데쯤에 들어서 있던 여동생에게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빠가 지금 하고 있는 고민의 내용을 나는 잘 모른다. 너도 역시 그 내용을 모를테지만, 올바르게 살기 위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 쯤은 알아두어라. 세상을 바르게 산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것만이라도 알아두어라. 그리고... 드러나는 것보다는 항상 근본이 중요하다고 가르쳐 온 에미로서, 네 오빠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난 아무 말 않겠다."
아, 그것은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흐린 불 밑에 앉아 구멍 난 양말 속에 알전구를 넣어 짜집기를 하시면서 "사람은 주변에 좋은 영향을 미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내 어릴 적 어머니의 모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고, 그 날 각인된 어머니의 양말 깁던 모습은 흐릿한 조명과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생생합니다.
며칠 후 나는 몇몇 선배들과 함께 여관에서 밤을 꼬박 새며 등사기로 밀어 낸('등사기를 민다'는 표현을 이해하는 학생들이 몇이나 있을까? 생각해 보면, 그때는 참으로 원시시대였습니다) 유인물 뭉치를 라면박스에 싸 들고 새벽에 학교로 들어가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손바닥에 잔뜩 묻은 등사 잉크도 지우지 못한 채였습니다.
그날 저녁, 경찰서에 연행된 학생들 속에서 유일한 1학년이었던 나는 "1학년밖에 안된 놈이 뭘 안다고 까부냐?"는 이유로 '간첩 잡는' 형사들에게 숱한 꼴밤을 얻어맞으며, 대공계 사무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새로운 인생의 분기점에 섰다는 감격으로 눈물지었습니다.
그날 이후 '뼈 빠지게 가르치고 논 밭 팔아서 대학이라고 보내 놓았더니, 배 고픈 줄 모르고 문제만 일으키는 철딱서니 없는 놈'의 무리에서 크게 벗어나 본 적은 없습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저를 보시면 농담처럼 말씀하십니다.
"저 녀석이 74년도 11월에 처음으로 잡혀가서 뚜드려 맞기 시작한 이래 오늘까지 단 하루도 제 정신 차려 본 날이 없다니까..."
돌이켜 보면, 대학을 나선 후의 전망이 제대로 모색되지 않는 참으로 암담한 시기였습니다. 졸업 후에는 재벌 회사의 금뱃지를 가슴팍에 달고 다니는 '자본의 하수인'이 되든지 '자본가를 때려부수는' 망치를 들고 노동자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뿐이었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어떤 선택이 옳은 것인지는 너무나 자명했습니다.
'사무전문직 노동운동'은 환상으로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요즘처럼, 사회에 나가 직장인으로 옳게 서서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할 수 없었던 황량한 시대였습니다. 그래도, 승냥이처럼 재빠른 솜씨로 목덜미를 나꿔챈 다음,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날렵하게 배를 걷어차는, 고도로 훈련된 백골단은 최소한 그 시대에 없었습니다.
아직도 날이면 날마다, 인원 동원을 준비하고, '원봉'을 어떻게 뚫어낼까를 고민하고, 수배된 학우들을 위한 '안가'를 마련해야 하고, 교문 앞을 불바다로 만들면서 저지선을 뚫기 위한 싸움을 준비해야 하는 한총련의 후배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 한 때 옳다고 생각되는 길을 부끄럼 없이 걷기도 하였으나 이제 그 길에서 내려와 길가에라도 남아있으려 애쓰는 내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선배를 부끄럽게 하는 후배야말로 제대로 된 후배입니다. 세상을 25년쯤 더 살아 본 자격으로 감히 말하건데... 그대들은 지금 내 나이가 되어서도 계속 그 길 위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결의를 다지면서 머리띠를 묶어매야 하는 노동자들과, 번화한 거리 뒷골목에서 단속반과 숨바꼭질을 벌여야 하는 노점상들과, 포크레인 삽날에 무너져 내리는 삶의 터전을 지켜 보아야 하는 철거민들과, 썩어 문드러진 논밭을 바라보며 이를 가는 농민들과, 참교육을 외치며 사랑하는 제자들 곁을 떠나야 했던 1,600여명의 전교조 교사들... 이들을 모두 진솔한 '우리'입니다. 그들과 친구가 되어야 제대로 된 대학생입니다.
최소한... 그런 생각으로 한국의 대학에 젊음을 바쳤던 사람들이 7·80년대에 수십만 명이나 있었다는 사실만이라도 기억해 주십시오.